투명함 · 산조(散調)
서정걸 (미술사 미술평론)
마당에 대한 추억
이만수의 최근작들이 내 기억의 한 자락을 들추어냈다. 지금은 사라져가고 있는 공간이 되었지만, 그곳은 유년기의 기억을 채우고 있는 정겨운 놀이터였으며 우리 삶의 가장 안온한 공간이기도 했다. 그 안전지대에서 우리는 놀며 자랐다. 집집마다 자신들의 고유한 영역으로서 한 조각씩 차지하고 있었던 마당. 그곳은 단순히 빈 공간이 아니라 고추나 벼같은 작물을 널어놓기도 하고 병아리들이 떼지어 몰려다니는 변화하는 화폭이었다.
우리는 그곳에 막대기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기도하고 금을 그어놓고 놀이를 했다 그곳은 사철 갖가지 풍경을 제공하는 광장이자 놀이터였으며, 때론 일터였다. 생각해보면, 마당은 단순한 흙바닥이 아니라 삶의 흔적이 묻어있는 곳이었다. 모깃불을 지핀 마당에서 밤하늘의 별을 보며 우리는 자랐다.
아침에 일어나 마당을 쓸어본 기억이 있다. 싸리비가 지나가며 만들어 놓는 자국들은 추상적인 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것은 몸가는 대로 휘저어 생성된 무작위의 선이었다. 토담 벽면의 그것이나 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의 문양, 분청사기의 귀얄문양이 또한 무작위의 선들이다. 창작의지나 계획된 행위가 아닌 순수한 형상들이자, 한국미술의 시원과 같은 것이다.
한국미술에 있어서 무작위는 '손가는 대로'라기 보다는 삶의 순수한 몸짓이자 자연의 몸짓이다. 칠하거나 그리거나 만드는 행위에서 인위적인 것을 최대한 배제하고 자연스러움을 추구한 것이다. 그러기에 구애됨이 없이 대범하다. 절제되어 있고, 겸손한 미덕이 있다. 서툰 듯 하지만 거칠거나 옹졸하지 않고, 어설픈 듯 하 지만 어긋나지 않는다.
이만수의 작업에서 한국미술이 함유하고 있는 미덕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지향하고 있는 조형적 태도가 어떠한 지를 말해준다. 작업 방법에 있어서 그는 칠공예 기법이나 상감기법 같은 우리 고유의 기법들을 응용하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의 많은 작가들에게서 한국적 감성은 발견된다. 그러한 미적 감성에 동양 회화를 학습하면서 얻은 지식과 자신이 개발한 기법, 현대적인 조형어법과 개인적인 취향 등이 가미되어 이만수 회화의 독창적인 모습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때때로 강한 연상작용을 불러일으키는 작품들을 만난다. 그것은 때로 화면의 이미지가 지시하는 것과 관계 없이 개인적인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다. 그 내용은 개인마다 다르지만, 거기에는 공통된 정서가 작용한다. 그의 작품에서 마당을 연상한 것은 개인적인 체험에서 연유했지만, 그 감성의 연원은 작가와 공유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만수 작품의 경우는 아마도 흙이 주는 부드럽고 따스한 정서가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이다. 어떤 안료에서도 느낄 수 없는 친근한 느낌의 질감. 서양음악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독특한 정서를 우리의 가락에서 발견 할 수 있듯, 그의 작품은 손톱만큼의 기름기도 가미되지 않은 천연의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
산조(散調) · 투명함
흙이 지닌 따스함과 정제되고 절제된 색채가 좋았다. 맑고 투명한 느낌이다. 90년대 후반의 그의 작품들은 거칠고 어두웠다. 시대적 분위기가 그러했고, 미술의 경향이 그랬다. 질풍노도와 같은 30대의 젊은 혈기가 온화함을 허락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 출품하는 그의 작품들은 놀랄만큼 변해있다. 그 바탕 이 온화하고 따뜻하며 안정되어 있다 표현방법이나 이미지의 활용 등에서 유사한 점들이 있으나, 작품이 지닌 품성이 변해있다. 조형적 목표가 뚜렸해진 느낌이다. 어둡고 탁한 분위기는 허물을 벗듯 사라지고 깊고 풍부한 세계를 보여준다. 그것은 아마도 연륜일 것이다. 적절히 절제되어 있고, 겸손함이 있는 화면이다. 이만수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맑음'과 '투명함'이다. 그 바탕 위에 산조의 가락을 연상시키듯 리듬감 있는 선들이 흩어져 있다.
맑고 투명함, 천연의 정제되고 부드러운 질감이 어떻게 생성되었나? 무엇보다도 흙이라는 재료의 독특한 사용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반복된 칠작업, 다시 닦아내는 그의 작업과정으로부터 정제되고 차분하고 깊이있는 화면이 생성되는 것이다.
그는 흙이 주는 훌륭한 예술적 느낌을 작품의 과정으로 수용했다. 그의 작업은 과정 그 자체가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한지 위에 아교를 바르고 그 위에 토분과 호분을 반복하여 칠한다. 칠하는 과정은 아마도 옛 칠공예가들의 장인적 숙련과 정성, 바탕을 만드는 경건함 속에서 이루어진다. 도공이 흙의 불순물을 걸러내고 찰지게 만드는 수비과정과 유사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토분을 두텁게 올린 후, 그 위에 그가 원하는(또는 무작위의 행위로서) 이미지를 그린다. 그린다기 보다는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들은 대나무나 매화 같은 이미지들을 보여주지만, 그는 마당에 비질을 하듯 무작위로 그려낸다. 매화나 대나무를 주제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지닌 리듬감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진정한 무작위, 그리고 조화로운 리듬감을 화면에 부여한다. 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어설픈 무작위는 지저분하거나 부조화스럽다.
90년대 후반의 작품들에 가해진 선들이 다소 무질서했다면 이번 작품들은 그런대로 상당한 경지를 보여준다. 속도감 있는 선들은 형상을 이룰 듯 말 듯, 흔적인 듯, 이미지인 듯, 또는 문양인 듯, 그렇게 화면에서 리듬감을 발산한다. 그 흔적들은 선승들의 무아지경도 아니고, 그저 마당을 쓸 듯, 겸손하고 솔직한 감성을 겨냥한 것이다. 그렇기에 자연스러움을 성취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칠하기와 닦아내기
그는 흔적 위에 원하는 색채를 도포한다. 그리고 다시 닦아낸다. 그러면 도포된 색채는 흔적 부분에 메워진 부분을 제외하고 모두 지워진다. 이러한 방법은 상감기법과 칠기기법 등 공예기법을 회화적으로 응용한 것이다. 때때로 꽃문양이나 인체형상을 오려 붙이기도 하는데 그것 역시 나전칠기 같은 공예적인 작업기법을 응용한 것이다.
특히 닦아내는 과정은 정교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닦아내는 정도에 따라서 느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는 물이 이용된다. 물의 양을 조절함에 따라 탁해질 수도 있고 맑아질 수도 있다. 그는 원하는 만큼 색채를 칠하고, 다시 원하는 만큼 색채를 덜어낸다. 물의 작용에 의해 화면은 맑게 걸러진다.
우리가 감상하는 것은 늘 결과물이지만, 작품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작가는 또 다른 예술적 경험을 한다. 작업과정에서 느끼는 작가의 경험을 관찰자가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그것은 별개이면서 동일할 수도 있다. 과정이 작품에 그대로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화면에 형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고안한 과정에 의해서만 표현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있고, 그 화면에서 관찰자는 작업과정에 있는 작가의 느낌을 간접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경험의 실체를 알 수는 없지만,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생성될 수 있는 분위기를 공감하는 것이다. 그것은 맑고 투명하고 두터운, 그리고 따뜻하고 그윽한 느낌이다.
이만수의 작품을 보면 그가 동양예술의 미학과 예술철학이 가리키는 좌표 위에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화가로서 동양적 또는 한국적 심미관에 가치를 두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을 현실적 가치, 현대인의 미감으로 현재화해내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그의 개성이 되는 것이다. 음미할수록 깊이를 느낄 수 있는 것, 바로 그것이 이만수 회화의 특징이다. 이번 전시작품들은 그가 오랫동안 고민하고 노력한 끝에 얻어낸 것이겠지만, 완숙한 작품세계로 들어가는 시작의 단계라고도 생각된다. 언제나 새로운 발견이 성취를 가져다준다. 새벽의 마당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을 때의 느낌처럼 명징한 정신이 담긴 훌륭한 작품들이 그의 손에서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
이만수의 최근작들이 내 기억의 한 자락을 들추어냈다. 지금은 사라져가고 있는 공간이 되었지만, 그곳은 유년기의 기억을 채우고 있는 정겨운 놀이터였으며 우리 삶의 가장 안온한 공간이기도 했다. 그 안전지대에서 우리는 놀며 자랐다. 집집마다 자신들의 고유한 영역으로서 한 조각씩 차지하고 있었던 마당. 그곳은 단순히 빈 공간이 아니라 고추나 벼같은 작물을 널어놓기도 하고 병아리들이 떼지어 몰려다니는 변화하는 화폭이었다.
우리는 그곳에 막대기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기도하고 금을 그어놓고 놀이를 했다 그곳은 사철 갖가지 풍경을 제공하는 광장이자 놀이터였으며, 때론 일터였다. 생각해보면, 마당은 단순한 흙바닥이 아니라 삶의 흔적이 묻어있는 곳이었다. 모깃불을 지핀 마당에서 밤하늘의 별을 보며 우리는 자랐다.
아침에 일어나 마당을 쓸어본 기억이 있다. 싸리비가 지나가며 만들어 놓는 자국들은 추상적인 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것은 몸가는 대로 휘저어 생성된 무작위의 선이었다. 토담 벽면의 그것이나 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의 문양, 분청사기의 귀얄문양이 또한 무작위의 선들이다. 창작의지나 계획된 행위가 아닌 순수한 형상들이자, 한국미술의 시원과 같은 것이다.
한국미술에 있어서 무작위는 '손가는 대로'라기 보다는 삶의 순수한 몸짓이자 자연의 몸짓이다. 칠하거나 그리거나 만드는 행위에서 인위적인 것을 최대한 배제하고 자연스러움을 추구한 것이다. 그러기에 구애됨이 없이 대범하다. 절제되어 있고, 겸손한 미덕이 있다. 서툰 듯 하지만 거칠거나 옹졸하지 않고, 어설픈 듯 하 지만 어긋나지 않는다.
이만수의 작업에서 한국미술이 함유하고 있는 미덕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지향하고 있는 조형적 태도가 어떠한 지를 말해준다. 작업 방법에 있어서 그는 칠공예 기법이나 상감기법 같은 우리 고유의 기법들을 응용하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의 많은 작가들에게서 한국적 감성은 발견된다. 그러한 미적 감성에 동양 회화를 학습하면서 얻은 지식과 자신이 개발한 기법, 현대적인 조형어법과 개인적인 취향 등이 가미되어 이만수 회화의 독창적인 모습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때때로 강한 연상작용을 불러일으키는 작품들을 만난다. 그것은 때로 화면의 이미지가 지시하는 것과 관계 없이 개인적인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다. 그 내용은 개인마다 다르지만, 거기에는 공통된 정서가 작용한다. 그의 작품에서 마당을 연상한 것은 개인적인 체험에서 연유했지만, 그 감성의 연원은 작가와 공유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만수 작품의 경우는 아마도 흙이 주는 부드럽고 따스한 정서가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이다. 어떤 안료에서도 느낄 수 없는 친근한 느낌의 질감. 서양음악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독특한 정서를 우리의 가락에서 발견 할 수 있듯, 그의 작품은 손톱만큼의 기름기도 가미되지 않은 천연의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
산조(散調) · 투명함
흙이 지닌 따스함과 정제되고 절제된 색채가 좋았다. 맑고 투명한 느낌이다. 90년대 후반의 그의 작품들은 거칠고 어두웠다. 시대적 분위기가 그러했고, 미술의 경향이 그랬다. 질풍노도와 같은 30대의 젊은 혈기가 온화함을 허락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 출품하는 그의 작품들은 놀랄만큼 변해있다. 그 바탕 이 온화하고 따뜻하며 안정되어 있다 표현방법이나 이미지의 활용 등에서 유사한 점들이 있으나, 작품이 지닌 품성이 변해있다. 조형적 목표가 뚜렸해진 느낌이다. 어둡고 탁한 분위기는 허물을 벗듯 사라지고 깊고 풍부한 세계를 보여준다. 그것은 아마도 연륜일 것이다. 적절히 절제되어 있고, 겸손함이 있는 화면이다. 이만수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맑음'과 '투명함'이다. 그 바탕 위에 산조의 가락을 연상시키듯 리듬감 있는 선들이 흩어져 있다.
맑고 투명함, 천연의 정제되고 부드러운 질감이 어떻게 생성되었나? 무엇보다도 흙이라는 재료의 독특한 사용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반복된 칠작업, 다시 닦아내는 그의 작업과정으로부터 정제되고 차분하고 깊이있는 화면이 생성되는 것이다.
그는 흙이 주는 훌륭한 예술적 느낌을 작품의 과정으로 수용했다. 그의 작업은 과정 그 자체가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한지 위에 아교를 바르고 그 위에 토분과 호분을 반복하여 칠한다. 칠하는 과정은 아마도 옛 칠공예가들의 장인적 숙련과 정성, 바탕을 만드는 경건함 속에서 이루어진다. 도공이 흙의 불순물을 걸러내고 찰지게 만드는 수비과정과 유사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토분을 두텁게 올린 후, 그 위에 그가 원하는(또는 무작위의 행위로서) 이미지를 그린다. 그린다기 보다는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들은 대나무나 매화 같은 이미지들을 보여주지만, 그는 마당에 비질을 하듯 무작위로 그려낸다. 매화나 대나무를 주제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지닌 리듬감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진정한 무작위, 그리고 조화로운 리듬감을 화면에 부여한다. 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어설픈 무작위는 지저분하거나 부조화스럽다.
90년대 후반의 작품들에 가해진 선들이 다소 무질서했다면 이번 작품들은 그런대로 상당한 경지를 보여준다. 속도감 있는 선들은 형상을 이룰 듯 말 듯, 흔적인 듯, 이미지인 듯, 또는 문양인 듯, 그렇게 화면에서 리듬감을 발산한다. 그 흔적들은 선승들의 무아지경도 아니고, 그저 마당을 쓸 듯, 겸손하고 솔직한 감성을 겨냥한 것이다. 그렇기에 자연스러움을 성취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칠하기와 닦아내기
그는 흔적 위에 원하는 색채를 도포한다. 그리고 다시 닦아낸다. 그러면 도포된 색채는 흔적 부분에 메워진 부분을 제외하고 모두 지워진다. 이러한 방법은 상감기법과 칠기기법 등 공예기법을 회화적으로 응용한 것이다. 때때로 꽃문양이나 인체형상을 오려 붙이기도 하는데 그것 역시 나전칠기 같은 공예적인 작업기법을 응용한 것이다.
특히 닦아내는 과정은 정교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닦아내는 정도에 따라서 느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는 물이 이용된다. 물의 양을 조절함에 따라 탁해질 수도 있고 맑아질 수도 있다. 그는 원하는 만큼 색채를 칠하고, 다시 원하는 만큼 색채를 덜어낸다. 물의 작용에 의해 화면은 맑게 걸러진다.
우리가 감상하는 것은 늘 결과물이지만, 작품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작가는 또 다른 예술적 경험을 한다. 작업과정에서 느끼는 작가의 경험을 관찰자가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그것은 별개이면서 동일할 수도 있다. 과정이 작품에 그대로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화면에 형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고안한 과정에 의해서만 표현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있고, 그 화면에서 관찰자는 작업과정에 있는 작가의 느낌을 간접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경험의 실체를 알 수는 없지만,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생성될 수 있는 분위기를 공감하는 것이다. 그것은 맑고 투명하고 두터운, 그리고 따뜻하고 그윽한 느낌이다.
이만수의 작품을 보면 그가 동양예술의 미학과 예술철학이 가리키는 좌표 위에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화가로서 동양적 또는 한국적 심미관에 가치를 두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을 현실적 가치, 현대인의 미감으로 현재화해내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그의 개성이 되는 것이다. 음미할수록 깊이를 느낄 수 있는 것, 바로 그것이 이만수 회화의 특징이다. 이번 전시작품들은 그가 오랫동안 고민하고 노력한 끝에 얻어낸 것이겠지만, 완숙한 작품세계로 들어가는 시작의 단계라고도 생각된다. 언제나 새로운 발견이 성취를 가져다준다. 새벽의 마당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을 때의 느낌처럼 명징한 정신이 담긴 훌륭한 작품들이 그의 손에서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