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s

마당 깊은 화면
박영택 (경기대학교, 미술평론)

이만수의 근작은 ‘산조’(散調)란 제목을 달고 있다. 흩어진 소리, 허튼 소리라!
그래서인지 그림들마다 잔잔하고 시정이 넘치면서 은은한 운율과 청각을 자극하는 소리들로 무성하다는 느낌이다. 그림 속에 시가 있고 음악이 있다. 우리네 가락과 운율이 짙게 베어 나오는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가 보다. 정악에 반한 자유로운, 파격에 가까운 음으로 모든 자연의 소리와 인간세의 소리가 다 들어와 무르녹은 그런 음의 시각화, 아울러 이미지와 소리가 하나로 고인 그림을 길어 올리고자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 소리/이미지는 무엇보다도 유년의 기억과 고향에 대한 추억으로 몰려 이를 시각과 청각 모두를 가볍게 흔들어대면서 흩어진다. 그림이 무척 허정하고 스산하다.
죽죽 그어놓은 듯한 붓질/선묘 자국이 빗질처럼 나있는 화면에 매화꽃이 눈송이처럼 떨어진다. 삭히고 걸러낸 토분색이 그대로 마당을 이룬 화면에 사람과 새, 집과 꽃, 차와 개 등이 둥둥 떠 있다. 무채색으로 가라앉아 멀건 화면에 홀로 서있는 이는 만사 고독해 보인다.
눈발마냥 꽃송이 흩날리는 적막한 봄날, 잔잔한 바람에 마냥 흔들리는 대나무 숲, 누군가의 등에 비치는 오후의 햇살, 마당에 내려와 무언가를 쪼아대는 새들, 느릿느릿 걸어 다니는 개가 있고 그런가하면 가물가물한 추억 위로 떠다니는 흐릿해진 어떤 이의 가물거리는 얼굴이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더러 죽죽 그어놓은 자국이 폭포가 되고 계곡이 되는가 하면 이내 대관령 고개 넘어가다 보이는 주변 산의 울울한 나무가 된다. 하단에 흐리게 그려진 인물을 보니 옛사람이 그린 관폭도나 관수도 또한 아른거린다. 화면은 순간 경계없이. 대책없이 무한해서 마냥 황홀하다. 무척이나 ‘센티멘탈’하다. 그리고 감각적으로 세련되게 조율되어있다. 나로서는 이 장면의 설정이 다분히 그의 고향 강릉에 관한 추억에서 연유한다고 생각한다. 대나무와 매화꽃이 가득하고 바닷가와 호수가 자리한 곳, 집과 마당이란 장소성에 대한 기억을 몇 가지 상징들과 함께 아련한 색채로 펼쳐 보이고 있다. 아련하고 박락되어 문드러진 색감은 지난 시간의 아득함과 아련한 추억, 몇 겹으로 주름을 만들고 가라앉는 시간의 퇴적을 암시한다.

한지 위에 아교를 바르고 토분과 호분을 반복하여 칠해 만든 독특한 화면은 부드럽고 연한 색채로 덮여 있다. 그것은 칠해지거나 스며들어 있기 보다는 종이와 완전히 밀착되어 견고하고 투명한 지지대가 되었다. 일정한 두께로 마감되어 있어서 그 피부 위를 긁고 메꿔서 생긴 자국이 붓질을 대신해서 독특한 선묘의 맛을 자아낸다. 지극히 평면적이면서도 긁어서 생긴 상처들과 그려진 이미지, 그리고 콜라주로 부착된 도상들로 인해 화면은 섬세한 요철효과로 인해 공간감을 자극한다. 해서 화면은 매우 얇은 저부조를 만들어 보인다. 그려진 부분과 인쇄된 종이를 오려 붙여 만든 콜라주, 여백 같은 바탕 화면에 수직과 수평으로 지나가는 붓질/선, 작게 위치한 일련의 도상들이 만나 형성한 화면은 독특한 시감을 만드는 데 주어진 평면위에 자리한 것들은 평등하게 존재한다. 여기에는 일종의 범신론적이고 물활론적 사유가 고여있다. 빛과 공간을 배제한 이 평면적인 화면은 색채와 반복적인 화면 구조 속에서 작은 형상들은 중심과 주변도 없이 순환되고 서로를 바라보거나 서성인다. 이들은 개별적인 개체로서 자리하는 존재이기 이전에 인연의 그물로서 연루되어 그 보이지 않는 관계 속에서 읽혀진다.

나뭇가지가 붓이나 칼, 연장이 되어 수직으로 흩어나간 자취는 마치 마당에 빗질을 해서 생긴 흔적 같다. 땅위에 새긴 무수한 인연과 시간의 자취, 지난 시간의 궤적과 뭇 생명체들이 대지/마당과 함께 했던 삶의 얼룩과 잔상들이 아롱진다. 그의 화면은 그대로 우리네 전통적인 마당이다. 그는 화면을 유년의 집 마당으로 설정했다. 바탕은 마당처럼 처리되고 붓질은 빗질처럼 구사되는 한편 마당에 서린 모든 흔적들을 촘촘히 그려 넣고 오려 붙였다. 그는 추억 속의 마당을 화면 위로 불러들여 재구성했다. 조감의 시선 아래 펼쳐진 세계는 자연과 사물, 인간이 바글거리는 기이한 풍경을 선사한다. 마치 산수화에서 접하는 시방식이 납작하게 평면화 시킨 공간 위로 스물 거리며 지나간다. 무엇보다도 작가의 내밀한 추억과 인성에서 차분하고 격조 있게 스며 나오는 이런 그림은 쉽게 접하기 어려운 것이다.
한국인에게 마당이란 장소성은 한국 문화 특유의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장소다. 비교적 넓은 마당을 두고 사람과 가축, 짐승과 꽃과 새들이 한 식구로 살았으며 그 위로 사계절의 시간이 내려앉았고 눈과 비가 왔으며 꽃잎이 떨어지거나 새가 날아와 앉았다 갔을 것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발자취와 그분들이 뒷모습이 어른거리고 누군가 태어났고 누군가 죽어서 그 마당을 마지막으로 생의 인연을 끊어내고 산으로 갔을 것이다. 어느덧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작가는 문득 고향과 마당 있던 자신의 집을 떠올려본 것 같다. 근작은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인 사연과 서사를 적극적으로 담아낸 그림이다. 이전부터 지속되어왔던 자연과 인간의 병치와 이중화면, 파스텔 톤으로 조율된 색채 등 표현방식은 여전하지만 근작은 그것들을 좀 더 안으로 밀어 넣고 있다. 맛깔스러우면서도 장식성이 강한, 동시에 전통적인 미감과 사유를 하나로 묶어내려는 시도가 눈에 밟히는 그림이다.

그림은 작가의 유년시절 고향과 관련된 이미지들이자 그 곳을 다니는 길에서 본 풍경들을 소환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 그것은 추억의 풍경이자 현재의 시간에서 수시로 출몰하는 진행형의 잔상들이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비늘처럼 퍼득이고 칼날처럼 반짝이는 것들을 현재의 시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림을 그리는 현재의 시간, 흐르는 그 시간의 등위에 과거의 기억들이 잠시 멈춰서서 부르르 떨다가 이내 응고되어 꽃잎처럼 진다. 지난 시간은 내밀하고 침침하게 내성적으로 자신을 이끈다. 그는 자신이 겪었던 구체적인 경험과 기억들, 무수한 시간의 주름과 결들을 납작한 평면위로 호명한다. 그림은 그 주름을 기억하고 각인하는 무슨 의식과도 같다. 그는 몇 겹으로 눌려있고 주름져있던 그 시절의 아련하고 비릿하고 가슴 아프게 시리고 저린 기억/사연들을 색채와 기호/도상들로, 빗질/붓질로 써나간다.
여기서 주름은 한 사물의 피부에 눌려있는 시간과 살아온 생의 기억들을 보여주는 상처다. 기억은 주름져있다. “주름은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과의 관계 혹은 의식의 통로이며 행위의 연속된 궤적이므로 시간 속에서 투명한 선으로 수렴된다.”(작가노트)
그래서인지 그림은 미세한 주름, 두드러진 굴곡같은 주름들로 채워져 있다. 그는 붓/빗으로 주름을 그린다. 이 세상은 온통 주름투성이다. 따라서 주름은 존재하고 있는 사물들과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에 대한 ‘존재증명’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이때 형태적 혹은 물리적으로 주름은 선이 되며 이는 형태의 최전선을 이룬다. 작가는 주름 속에 분포되어 지속되는 삶의 모습과 기억 혹은 리듬을 ‘산조’라 부른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의 그림은 '산조‘(散調)란 제목을 달고 있다. 이 상형문자로 기록된 그림은 “적막한 봄날, 바람에 흩날리는 꽃송이와 흔들리는 숲-소리, 마당과 들녘, 산과 바다-그리고 이 모든 것들 사이에 개입하는 시간과 공간의 궤적 속에 부유하는 희미한 얼굴들과 사물들에 대한 표현이다.”(작가노트)

그는 납작한 평면의 종이/캔버스의 피부위에 동양화물감과 백토를 칠하고 빗자루질을 한다. 그것은 모필의 필력과 동일시된다. 골을 메꾸고 칠해나간 색들을 다시 벗겨내는 일이다. 비워내고 지우고 탈색을 거듭해서 만든 그야말로 허정하고 깊은, 모든 것들이 다 스친 후에마지막으로 남겨진 느낌을 만든다. 여러 번의 빗질/붓질은 사람 사는 일의 갈등과 고뇌, 무수한 사연의 겹침들이자 그것들을 씻고 닦아내는 일종의 해원과도 같다. 그는 새벽 혹은 해거름 그 사이의 지점에서 마당을 떠올렸다. 그에게 어린 시절 집 마당이란 “모두에게 열려있는 공간이며, 생겨나고 사라지는 삶이 욕망뿐 아니라 자연의 모든 것들이 관찰되고 사유되어지는 거울과 같은 장소”다. 그 마당을 쓴다는 느낌으로 화면에 붓질/빗질을 하면서 쓰는 것은 “무엇인가를 씻어내는 일이자 그곳에 묻혀있는 인연들을 반추함과 동시에 끊임없이 솟아나는 삶의 욕망과 집착의 반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마음의 행위“란다.
해서 채색과 탈색을 반복한다. 쓰고 지우고 칠하고 벗겨내기를 지속한다. 마치 산조의 리듬처럼 말이다. 긋고 칠하고 칠한 만큼 닦아내는 과정의 반복을 통해 작가는 “삶의 주름들을 긍정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르고 리듬감 있는 선조와 투명한 색조의 희열”에 이르고자 한다. 그것은 “절정의 순간에 대한 서술이며 텅 비어있는 순간에 대한 체험”에 다름 아니기에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