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으로 쓱쓱 그린 그림이 아니다. 만들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언뜻 보면 물감으로 색을 칠한 것 같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다. 흔한 채색 방식이 아니란 걸. 쓰인 재료는 흙과 물, 그리고 아교와 가루물감(분채,석채등)이다. 여느 (동양화) 그림과 다른 질감, 부드럽고 깊은 느낌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반적인 지필묵 운용이 아니다. 표면은 평편하고 납작하며 매끄럽고 깔끔하다. 유니크한 텍스춰는 촉각을 자극한다. 만지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관객을 그림 앞으로 끌어당기는 매력을 지녔다. 눈에 보이는 질료로서 최종 결과물은 흙. 아교를 접착제 삼아 흙가루를 물감처럼 사용한다. 견고하게 고착된 ‘흙-물감’은 색과 형태를 지닌 도상으로 구체화 된다. 반면 물은 그렇지 못하다. 제작과정 중에 모두 증발하기 때문이다. 역할을 끝낸 배우가 무대 뒤로 퇴장하듯, 물은 서서히 사라진다. 시간에 순응하는 자연의 섭리. 한때 존재했지만 결국 소멸하는 생명의 운명이다. 대신 캔버스 위에서 움직였던 작가의 몸짓, 움직임의 궤적이 물의 흔적으로 고스란히 남는다. 가뭄에 드러나는 메마른 강줄기나 저수지 바닥처럼, 물 흔적은 아스라이 드러난다. 물로 씻어내도 지워지지 않고 끝까지 남은 앙금, 헝겊으로 닦아 낼 때 생긴 얼룩, 젓은 상태에서 빗자루-붓으로 그려서 생긴 상처 같은 자국, 건조된 후 긁어내서 파낸 홈들 …. 흙이 남긴 행위의 증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지층처럼 쌓여 축적된다. 이렇듯 천연재료와 작가의 행위가 결합해 만들어진 ‘특별한 오브제’가 이만수 작품이다. 몸짓과 함축으로 구현된 마음의 잔상이다.
제작과정을 되짚어보면 이렇다. 먼저, 고령토 또는 백토 덩어리를 얇게 썰어서 바짝 말린다. 잘 마른 흙 조각을 손으로 잘게 부수고, 다시 분쇄기로 갈아서 고운 가루로 만든다. 이걸 아교와 버무려서 물감처럼 사용한다. 물 농도를 조절하며 캔버스 또는 한지 위에 바른다. 여기에 황토와 분채 등을 섞으면 붉거나 푸른색처럼 원하는 색을 낼 수도 있고, 아무것도 섞지 않으면 흙먼지 같은 옅은 미색이 난다. 건조되는 상태를 봐가며 적당한 타이밍에 흐르는 물로 캔버스 표면을 씻어낸다. 이때 흙-물감 대부분, 심지어 80~90%가량 지워지기도 한다. 그래도 미세한 흙 분말이 표면에 남아 얇은 막을 형성한다. 이 레이어(layer)가 겹겹이 쌓여 퇴적층 같은 상태가 된다. 넓은 색면 바탕을 구축하는 과정, 여기까지가 1차 공정이다. 구체적 형상이 얹어지기 이전, 이 텅 빈 화면은 그 자체로 웬만한 모노크롬이나 색면추상회화에 버금가는 밀도와 완성도를 보여준다. 그 위에 이미지를 표현하는 2차 작업공정은 다시 지난한 과정을 거친다. 상감(象嵌) 또는 나전(螺鈿)과 비슷하다. 인물이나 꽃무늬 문양을 종이에 스케치한 후 가위로 오린다. 1차 공정을 마친 바탕 위에 이리저리 배치하며 구도를 잡는다. 오려낸 종이 외곽선을 본 따 밑그림을 그리고 그 모양대로 홈을 파낸다. 채 굳지 않은 표면을 긁어내거나 선을 그어 패턴을 새길 수도 있다. 그리고 석채, 분채, 흙 등을 섞어 만든 물감으로 메우고 이 부분을 다시 물로 씻어내면서 표면을 고르게 만든다. 대나무가지를 엮어 만든 빗자루-붓, 헝겊, 스티로폼 같은 뜻밖의 재료가 이때 사용된다. 이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하며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이런 제작방식은 벼락치기 공부 같은 얄팍한 수법을 허락하지 않는다. 절차를 건너뛰거나 생략하지도 않는다. 곰삭은 시간을 인내해야 하는 발효, 숙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평론가 고충환은 이를 일컬어 ‘자기수양’이고 ‘수신(修身)’이라고 말했다. 그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관계로 만들어지는 풍경들
형식에서 이룬 성과 못지않게 내용에서도 정체성이 명확히 드러난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감흥은 이러하다. 무엇보다 정갈하다. 군더더기가 없다. 요란스럽지도 않다. 파격이나 즉흥은 드러나지 않는다. 생짜, 날것의 정서가 아니다. 그래서 차분하고 편안해 보인다. 안정적이어서 불안과는 거리가 멀다. 화려함과는 차원이 다른 장식성이 돋보인다. 점잖은 성품과 선비 같은 작가의 인품이 그림 속에 고스란히 투영된 듯하다.
아무래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인물, 까치, 강아지 같은 구상 형태다. 이어서 꽃무늬 혹은 별자리 같은 패턴문양이 차례로 보인다. 배경/여백 구실을 하는 비정형 색면은 맨 마지막에 눈에 들어온다. 먼저 보인다고 해서 주인공은 아니다. 그것은 부분에 불과하다. 배경/여백과 한데 묶어서 볼 때 작품이 제대로 보인다. 부분과 전체를 통합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작품에서 풍기는 특유의 조형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디테일과 구조를 종합적으로 조망해야 작품 이면에 담긴 내러티브가 온전히 파악된다.
거의 모든 작품에서 발견되는 핵심 테마는 ‘사람’이다. 초기작부터 ‘얼굴’과 ‘신체’ 도상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얼굴과 신체는 사람을 상징하는 기호형태, 즉 기표(記標)다. 의미를 담고 있는 내용인 기의(記意)는 작가 자신을 비롯한 익명의 삶에 대한 통찰이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는 인간의 얼굴과 동물의 머리를 구분했다. 모든 동물이 머리를 갖지만 모든 동물이 얼굴을 갖는 것은 아니라며, 머리와 달리 얼굴에선 표정을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얼굴은 신체로부터 벋어나 특정한 표현 능력을 지닌 ‘풍경’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 얼굴로 풍경으로 만들거나 반대로 풍경으로 얼굴로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에펠탑이나 개선문 풍경이 파리의 ‘얼굴’로 상징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같은 맥락에서 이만수 그림에 새겨진 사람형상도 풍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양한 전신(全身) 포즈에서 각기 다른 표정을 읽어낼 수 있다. 예컨대 절하는 사람 모습이 그렇다.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엎드린 사람형상은 염원, 감사, 공경의 뜻을 담고 있다. 세상에 대한 겸손과 인간에 대한 애정, 연민이 깃들어있다. 얼굴이 아닌 신체가 만들어내는 표정이다. 이뿐만 아니다. 걸어가는 사람, 핸드폰 보는 사람, 쪼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 웅크려 옆으로 누워있는 사람, 어깨가 구부정하게 굽은 노인, 폴짝 뛰어오르는 젊은이, 빗자루를 손에 들고 서 있는 사람(아마도 작가 자신일게다) …. 그야말로 남녀노소 각양각색, 천태만상 천차만별이다. 이만수의 작품은 그들을 통해 보여주는 ‘인물 풍경화’다. 세상을 관조하는 작가의 마음이 투영된 ‘시대의 초상’이다.
개별 도상이 지닌 의미 못지않게 서로 관계 맺으며 생성되는 이야기를 해석하는 것도 중요하다. 어떻게 연출되느냐에 따라 상황은 변한다. 예를 들어, 까치 한 마리가 홀로 있을 때와 두 마리가 같이 있을 때 이야기 성격은 달라진다. 꽃무늬도 패턴도 마찬가지다.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는 병렬구조는 장식적인 요소가 두드러지지만 불규칙한 군집으로 표현된 패턴은 밤하늘 별자리나 꽃밭을 연상케 한다. 사물의 배치에 따라 해석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것은 ‘구성하는 그림’에서 ‘구성되는 그림’으로 의미가 전복된다는 뜻이다.
시각에 근거한 이미지와 메시지는 <산조(散調)>라는 제목으로 인해 청각 영역으로까지 감각이 확장된다. 산조는 가야금이나 거문고, 대금, 피리, 아쟁 같은 국악기를 장구 반주에 맞춰 홀로 연주하는 독주곡을 말한다. 즉흥연주인 시나위보다 훨씬 엄격한 형식미를 요구한다. 느림과 빠름, 높고 낮음, 애절함과 신명 사이를 오가며 듣는 사람의 심금을 들었다 놨다 조율한다. 희로애락을 농축된 소리로 풀어내는 음악이다. 그림에서도 음률과 장단이 들리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그림이 한 장의 악보처럼 보이기도 한다. 넓은 색면이 만나는 경계선과 가로로 촘촘히 그어진 줄무늬는 오선지 같고, 그 위에 자리 잡은 인물과 문양패턴은 음표처럼 보인다. 물론 다른 은유를 품고 있기도 하다. 아니, 은유보다는 함축에 더 가깝다. 강원도 대관령 안반데기에 줄지어 펼쳐진 고랭지 배추 밭고랑, 첩첩이 겹치며 끝없이 이어지는 산 능선, 잔잔한 파도 물결이나 반짝이는 윤슬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색면이 만나는 경계지점에 자연스럽게 생긴 가로 직선은 수평선처럼 보이지만 일반적인 수평선이 아니다. 육지에서 바다를 보는 시점이 아니라, 배를 타고 바다나 호수 가운데로 나가서 육지 쪽을 바라볼 때 보이는 광경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고향이 강릉임을 감안하면 이런 추측은 더욱 설득력 있다. 태백산맥을 등지고 보는 동해안 수평선이 아니라 바다 멀리서 바라보는 산맥 능선과 그 아래 해안선으로 연상할 수 있다.
캔버스 외곽 끄트머리에 둘러 처진 테두리는 문장의 마침표 같은 구실을 한다. 그림의 완결성을 결정짓는 조형 요소이면서 내부와 외부 세계를 구분 짓는 상징적인 경계선이기도 하다. 이 테두리를 통해 그림은 독립된 자족적 실체로서의 존재감을 재차 확인받는다.
이만수는 1990년대 중후반부터 줄곧 자신이 개발한 제작기법에 몰두해왔다. 오랜 시간을 통해 자기만 알 수 있는 데이터를 축적했다. 그 과정에서 수 없는 실패를 겪었지만, 결국 어느 순간 ‘몸이 기억하는 테크닉’을 스스로 터득하고 그 감각을 몸에 익혔다. 과학자는 실험을 통해 가설을 증명한다. 모든 것을 측정해서 수량화하거나 수학적 공식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예술가는 수학 공식보다 직관이 중요하다. 이성으로 판단할 수 없는 감각의 불확정성을 인정하고 수용한다. 이만수 그림은 ‘실패를 수용하는 긍정의 힘’에서 비롯된 성과물이다. 의도된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도달한 필연의 결과물이다. 절제미와 함축으로 빚은 의미의 결정체다.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과 다르지 않다. 파괴는 우연이고 창조는 필연이다. 파괴는 창조를 낳는다. 창조가 단 한 번의 생성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곧 낡은 것이 돼버린다. 따라서 예술가의 파괴는 또 다른 생성과 창조로 이어진다. 이만수 작업이 바로 이러하다. 머리가 아닌 망치로 철학하고, 개인의 자유 정신(의지)에 의한 영원회귀를 긍정하는 ‘위버맨쉬(übermensch, 超人)!’. 창조를 위한 파괴를 긍정하는 디이오니스적 철학자(니체)의 면모가 이만수와 오버 랩 된다. 그는 관습을 답습하지 않는다. 기존 (동양)미술이 고수하며 유지해온 형식 틀을 극복하려고 도전한다.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제기한 ‘패러다임’에 빗대어 말하면, 지배적이고 주도적이며 보편적인 규범을 애써 거부한다. 혁신적인 탐구 자세로 기성의 가치를 초월하려는 시도다. 이런 의미에서 이만수는 진지하게 사유하고 신중하게 몸으로 실천하는 아티스트다. 과학자의 실험정신, 발명가의 창의력, 장인의 숙련된 솜씨, 엔지니어의 능숙함, 테크니션의 섬세함과 성실함을 고루 겸비한 ‘21세기 르네상스 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