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자연의 울림과 운율
이주헌 (미술평론가)
20세기 이전의 서양미술 전통을 일컬어 흔히 ‘환영 창조의 전통’이라고 한다. 허구의, 그러나 사실같은 이미지를 창조해온 전통 이라는 의미다. 그만큼 서양에서는 사물과 공간을 사실처럼 재현해내는 데 오랫동안 큰 관심을 쏟아왔다. 원근법, 스푸마토 기법, 키아로스쿠로 기법 등 다양한 재현 기법이 그렇게 발달했다. 이렇게 환영을 창조하는 전통이 중시되면서 서양미술에서는 인간이 그 주된 표현 대상이 됐다. 무엇보다 인간은 인간이 재현하고픈 가장 매력적인 대상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재현이 종국적으로 욕망의 재현이라는 점에서 욕망의 주체인 인간을 표현하지 않고 욕망을 재현해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반면 동양에서는 자연이 그 주된 표현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것은 동양의 미술이 세계의 사실적인 재현에 그다지 관심을 두어오지 않은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유교문화나 불과문화는 기본적으로 현상에 매몰되는 것을 꺼린다. 현상이면의 본질을 더 중시한다. 동양에서 현상을 뜻하는 가장 대표적인 글자가운데 하나가 색(色)이다. 예부터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했고, 오늘날에도 색은 색깔론, ‘색을 밝힌다’ , 도색잡지 등 부정적인 표현에 주로 쓰인다. 이런 부정적인 표현은 이 글자가 인간의 욕망을 진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여기기에 생겨난 것이다. 즉, 색은 욕망의 시각적 현현이고 욕망은 동양미술에서는 억제돼야 할 표현대상이었다. 사실 산수를 그린다 해도 동양의 산수는 순수한 현실 속의 자연이라기보다 정신세계, 혹은 우주를 관통하는 철리(哲理)의 시각적 상징에 더 가깝다. 따라서 현상의 재현을 통해 욕망이 분출되는 것을 피하고 세계의 본질을 보다 명료히 드러내기 위해 사실상 추상적 성격이 강한 산수화를 선호하게 됐던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이만수의 그림은 그 좌표가 다소 애매해 보일 수 있다. 그는 어쨌든 인간을 중요한 소재로 다룬다. 그리고 색을 적극 활용한다. 그럼에도 그의 그림은 동양화, 혹은 한국화로 분류된다. 그의 그림이 과연 서구의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동양의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인가? 사실 이런 질문은 이만수에게만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요즘 많은 한국화들에게 동일하게 던져지는 것이다. 한국화가 이런 의문부호 위에서 정체성 문제로 고민하게 되는 것은 그런만큼 불가피한 시대적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같은 질문도 따지고 보면 상당히 표피적인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흔히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편의에 따라 한국화니 서양화니 하며 지역에 따라 장르를 가른다. 인간의 예술인식이 동일하다면 그대상이나 방법상의 차이를 들어 굳이 편을 가르는 것은 상당히 소아적인 시각이다. 물론 문화의 충돌과정에서 발생한 형식상의 혼란을 정리 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겠으나 그것은 시간의 도움을 얻어야할 유장한 일이다. 당장 중요한 것은 어떤 문화에 속한 것이든 주어진 전통과 새로 다가오는 전통에서 그 진정한 인간정신 혹은 인간의지 등을 찾고 이으며 이를 하나의 예술작품을 현재화하려는 노력이라 할 것이다. 이만수는 자신이 우리 전통으로부터 체현해야 할 중요한 가치, 또 문화의 경계를 넘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로 ‘성(誠)’을 생각했고, 이를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데 많은 힘을 쏟아왔다. 성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로 보아도 정성스러움, 혹은 성실함을 나타내는 말이 아닌가. 서둘러 자기를 규명하고 확립하기보다, 나아가 스스로 완성된 존재라고 쉽게 나서기보다, 그저 성실히 맡은 일, 혹은 주어진 바를 온전히 이루려 부단히 땀을 쏟는 것, 거기서 의미를 찾으려는 것이 이만수의 붓길이다. 동양화니 서양화니 하며 선을 긋기 이전에, 현대의 예술은 어떠해야 한다느니 하며 정의를 내리기 이전에, 화포에 먼저 붓부터 들이대는 것, 곧 예술이 그 스스로 이런 속성을 이해한다면, 오늘의 세계가 어떻게 헝클어져 있든 예술가라는 자는 일단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평상심 위에서 붓길을 이어가는 존재여야 하지 않을까. 어차피 온전한 완성이란 있을 수 없으므로.
앞서도 말했듯 이만수의 그림에는 사람이 곧잘 등장한다. 때로는 얼굴이 큼지막하게 클로즈업돼 표현돼 있고 때로는 전신이 다 잡혀 있다. 사람의 신체 선묘가 패턴처럼 배경에 좍 깔려 있는 경우도 있다. 전통적인 서양미술의 시각에서 보자면, 인간은 지금 그림 속에서 벌어지는 상황의 주인공이자 주체이다. 전통적인 동양미술의 시각에서 보자면, 인간은 그림 속을 관류하는 철리의 한 관찰자이다. 관찰자로서의 인간은 산수화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는 인간이 그림 안에서 작은 관찰자로 존재함으로써 그려진 산수가 바라봄의 대상이라는 것과, 그 산수의 실제적 크기가 인간의 크기와 관련해 어떤 비례를 갖는지 명료히 가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듯 서양미술의 인간이 개척하고 투쟁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동양미술의 인간은 음미하고 깨닫는 존재이다. 사실 어느 존재를 더 우월하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그것은 동일한 인간의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서양미술에서 인간을 형상화하는 전통이 굳게 선 것은, 개척하고 투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부각됐기 때문이다. 그는 무대의 중심에 서 있다. 동양 미술에서 인간을 형상화하는 전통이 비교적 약했던 것은, 음미하고 관찰하는 자로서 인간이 세계에 대해 늘 일정한 거리를 두어왔기 때문이다. 그는 무대 뒤에서, 혹은 옆에서 지금 벌어지는 상황을 바라보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만수의 사람이 이들 가운데 그 어느 일방이 아닌, 양자의 특징을 다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그의 인간은 현재 우리가 서 있는 문화충돌의 현장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림을 좀 더 자세히 분석해 보자. 그의 인간은 익명의 존재다. 보편적 인간이다. 특정한 모델을 두고 그린 그림이 아니다. 그 사람의 생김새로부터 현실의 특정한 인간을 확인해내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사람은 米點(미점)처럼 저 멀리 사라져가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얼굴만 부각되거나 몸이 화면 중심부에 턱하니 자리잡은 것이 화면상의 주체가 분명하다. 이렇게 익명성과 주체성이 동시에 만날 때 우리는 그 인물상에서 자연스레 작가의 존재를 떠올리게 된다. 지금 그림밖에 있으나 그림에 가장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인간, 그는 작가다. 가장 보편적인 익명의 인간이 화면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주체로 등장하기 위해서는 작가라는 정체성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다. 창조자로서의 예술가는 창조의 순간, 그 스스로 모든 인간이면서 이 세상에 단 하나의 자화상이다. 화가의 자화상이기도 하면서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 인간상은 자연히 화폭 전체를 자신의 울림으로 감싼다. 그 주체가 창조자로서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계의 중심으로서 세계에 개입하고 장악해나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한편으로, 이만수는 음미하고 사유하는 인간의 모습 또한 진지하게 투영하고 있다. 일단 그의 인간이 상당히 정적인 포즈를 하고 있는 점을 유의해 보자. 얼굴도 대체로 정측면의 얼굴이 많고, 신체가 그려진 경우 그 신체의 표정도 상당히 정적이다. 그의 인간은 지금 사고하고 있다. 혹은 세상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 그가 사유하는 인간이라는 것은 그가 놓여 있는 공간이 사실상 자연스런 현실적 공간이 아니라 관념의 공간이라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그 공간은 그림 속 인간이 전개하는 사고의 편린들로 이어진 그런 공간이다. 그러니까 세계를 장악한 그는 어느덧 자신의 생각 속에, 자신의 꿈속에, 자신의 추억 속에 잠긴 그런 존재가 된 것이다. 화면상에 나타나는 색색의 점들, 선들, 그리고 기타 이미지들은 그의 생각 속에서 떠도는 기억들의 상징 같은 것이다. 그것은 우물물을 마시고 시원한 밤하늘을 쳐다보면 추억일 수도 있고, 매화가 핀 봄에 그 꽃에 취해 흥겨워하던 추억일 수도 있다. 그런 기억이 그의 주위를 감쌀 때 그는 옛 선비들이 자연의 서정을 못 이겨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던 전통에 자연스럽게 합일해 간다. 그런 서정이 짙어질수록 그의 그림 속 인간은 그려진 형태에 비해 훨씬 작게 느껴지고 추억의 싯귀들은 그만큼 큰 울림으로 퍼져나간다. 여기서 인간은 다시 자연의 작은 관찰자일 뿐이다. 그 울림이 전통 산수의 그것처럼 유장하게 퍼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생생히 포착한 것이 매화꽃 문양이 규칙적으로 점점이 박힌 화폭이다. 인간 형상이 들어간 화면과 분리돼 추상화된 그 화폭에서 우리는 전통적인 동양 회화의 깊은 정신세계를 다시금 맛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인간은 비켜서 있고 오로지 자연이 중심에 선 그런 느낌이다. 이만수가 기왕에 즐겨 써오던 ‘성’이라는 주제어 외에 ‘산조(散調)’ 라는 주제어를 택해 ‘성-산조’로 이번 전시의 타이틀을 삼은 것도 바로 그런 울림의 증폭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의 중심인, 주체로서의 인간으로부터 시작해 개인의 관념과 서정, 나아가 자연과 우주의 울림에 이르기까지 그 증폭되는 장단을 그는 가야금산조의 운율에 맞춰 전개시킨 것이다.
이렇듯 이만수는 오늘의 우리가 당면한 복합적인 상황과 그에 대한 우리의 정서적 반응을 나름의 방식으로 풀고 엮고 조형화하고 있다. 거기에 고정된 장르나 양식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의 의도와 지향을 놓치는 꼴이 된다. 그는 풀어둔 채 그대로 두지도 않고 또 엮어놓은 채 그대로 두지도 않는다. 꾸준히 풀고 엮고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의 예술적 지향이 ‘성(成)’ 이 아니라 ‘성(誠)’ 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흔들리는 시대일수록 더욱 가치 있는 덕목이 아닌가 싶다.
유교문화나 불과문화는 기본적으로 현상에 매몰되는 것을 꺼린다. 현상이면의 본질을 더 중시한다. 동양에서 현상을 뜻하는 가장 대표적인 글자가운데 하나가 색(色)이다. 예부터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했고, 오늘날에도 색은 색깔론, ‘색을 밝힌다’ , 도색잡지 등 부정적인 표현에 주로 쓰인다. 이런 부정적인 표현은 이 글자가 인간의 욕망을 진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여기기에 생겨난 것이다. 즉, 색은 욕망의 시각적 현현이고 욕망은 동양미술에서는 억제돼야 할 표현대상이었다. 사실 산수를 그린다 해도 동양의 산수는 순수한 현실 속의 자연이라기보다 정신세계, 혹은 우주를 관통하는 철리(哲理)의 시각적 상징에 더 가깝다. 따라서 현상의 재현을 통해 욕망이 분출되는 것을 피하고 세계의 본질을 보다 명료히 드러내기 위해 사실상 추상적 성격이 강한 산수화를 선호하게 됐던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이만수의 그림은 그 좌표가 다소 애매해 보일 수 있다. 그는 어쨌든 인간을 중요한 소재로 다룬다. 그리고 색을 적극 활용한다. 그럼에도 그의 그림은 동양화, 혹은 한국화로 분류된다. 그의 그림이 과연 서구의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동양의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인가? 사실 이런 질문은 이만수에게만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요즘 많은 한국화들에게 동일하게 던져지는 것이다. 한국화가 이런 의문부호 위에서 정체성 문제로 고민하게 되는 것은 그런만큼 불가피한 시대적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같은 질문도 따지고 보면 상당히 표피적인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흔히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편의에 따라 한국화니 서양화니 하며 지역에 따라 장르를 가른다. 인간의 예술인식이 동일하다면 그대상이나 방법상의 차이를 들어 굳이 편을 가르는 것은 상당히 소아적인 시각이다. 물론 문화의 충돌과정에서 발생한 형식상의 혼란을 정리 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겠으나 그것은 시간의 도움을 얻어야할 유장한 일이다. 당장 중요한 것은 어떤 문화에 속한 것이든 주어진 전통과 새로 다가오는 전통에서 그 진정한 인간정신 혹은 인간의지 등을 찾고 이으며 이를 하나의 예술작품을 현재화하려는 노력이라 할 것이다. 이만수는 자신이 우리 전통으로부터 체현해야 할 중요한 가치, 또 문화의 경계를 넘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로 ‘성(誠)’을 생각했고, 이를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데 많은 힘을 쏟아왔다. 성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로 보아도 정성스러움, 혹은 성실함을 나타내는 말이 아닌가. 서둘러 자기를 규명하고 확립하기보다, 나아가 스스로 완성된 존재라고 쉽게 나서기보다, 그저 성실히 맡은 일, 혹은 주어진 바를 온전히 이루려 부단히 땀을 쏟는 것, 거기서 의미를 찾으려는 것이 이만수의 붓길이다. 동양화니 서양화니 하며 선을 긋기 이전에, 현대의 예술은 어떠해야 한다느니 하며 정의를 내리기 이전에, 화포에 먼저 붓부터 들이대는 것, 곧 예술이 그 스스로 이런 속성을 이해한다면, 오늘의 세계가 어떻게 헝클어져 있든 예술가라는 자는 일단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평상심 위에서 붓길을 이어가는 존재여야 하지 않을까. 어차피 온전한 완성이란 있을 수 없으므로.
앞서도 말했듯 이만수의 그림에는 사람이 곧잘 등장한다. 때로는 얼굴이 큼지막하게 클로즈업돼 표현돼 있고 때로는 전신이 다 잡혀 있다. 사람의 신체 선묘가 패턴처럼 배경에 좍 깔려 있는 경우도 있다. 전통적인 서양미술의 시각에서 보자면, 인간은 지금 그림 속에서 벌어지는 상황의 주인공이자 주체이다. 전통적인 동양미술의 시각에서 보자면, 인간은 그림 속을 관류하는 철리의 한 관찰자이다. 관찰자로서의 인간은 산수화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는 인간이 그림 안에서 작은 관찰자로 존재함으로써 그려진 산수가 바라봄의 대상이라는 것과, 그 산수의 실제적 크기가 인간의 크기와 관련해 어떤 비례를 갖는지 명료히 가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듯 서양미술의 인간이 개척하고 투쟁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동양미술의 인간은 음미하고 깨닫는 존재이다. 사실 어느 존재를 더 우월하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그것은 동일한 인간의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서양미술에서 인간을 형상화하는 전통이 굳게 선 것은, 개척하고 투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부각됐기 때문이다. 그는 무대의 중심에 서 있다. 동양 미술에서 인간을 형상화하는 전통이 비교적 약했던 것은, 음미하고 관찰하는 자로서 인간이 세계에 대해 늘 일정한 거리를 두어왔기 때문이다. 그는 무대 뒤에서, 혹은 옆에서 지금 벌어지는 상황을 바라보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만수의 사람이 이들 가운데 그 어느 일방이 아닌, 양자의 특징을 다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그의 인간은 현재 우리가 서 있는 문화충돌의 현장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림을 좀 더 자세히 분석해 보자. 그의 인간은 익명의 존재다. 보편적 인간이다. 특정한 모델을 두고 그린 그림이 아니다. 그 사람의 생김새로부터 현실의 특정한 인간을 확인해내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사람은 米點(미점)처럼 저 멀리 사라져가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얼굴만 부각되거나 몸이 화면 중심부에 턱하니 자리잡은 것이 화면상의 주체가 분명하다. 이렇게 익명성과 주체성이 동시에 만날 때 우리는 그 인물상에서 자연스레 작가의 존재를 떠올리게 된다. 지금 그림밖에 있으나 그림에 가장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인간, 그는 작가다. 가장 보편적인 익명의 인간이 화면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주체로 등장하기 위해서는 작가라는 정체성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다. 창조자로서의 예술가는 창조의 순간, 그 스스로 모든 인간이면서 이 세상에 단 하나의 자화상이다. 화가의 자화상이기도 하면서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 인간상은 자연히 화폭 전체를 자신의 울림으로 감싼다. 그 주체가 창조자로서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계의 중심으로서 세계에 개입하고 장악해나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한편으로, 이만수는 음미하고 사유하는 인간의 모습 또한 진지하게 투영하고 있다. 일단 그의 인간이 상당히 정적인 포즈를 하고 있는 점을 유의해 보자. 얼굴도 대체로 정측면의 얼굴이 많고, 신체가 그려진 경우 그 신체의 표정도 상당히 정적이다. 그의 인간은 지금 사고하고 있다. 혹은 세상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 그가 사유하는 인간이라는 것은 그가 놓여 있는 공간이 사실상 자연스런 현실적 공간이 아니라 관념의 공간이라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그 공간은 그림 속 인간이 전개하는 사고의 편린들로 이어진 그런 공간이다. 그러니까 세계를 장악한 그는 어느덧 자신의 생각 속에, 자신의 꿈속에, 자신의 추억 속에 잠긴 그런 존재가 된 것이다. 화면상에 나타나는 색색의 점들, 선들, 그리고 기타 이미지들은 그의 생각 속에서 떠도는 기억들의 상징 같은 것이다. 그것은 우물물을 마시고 시원한 밤하늘을 쳐다보면 추억일 수도 있고, 매화가 핀 봄에 그 꽃에 취해 흥겨워하던 추억일 수도 있다. 그런 기억이 그의 주위를 감쌀 때 그는 옛 선비들이 자연의 서정을 못 이겨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던 전통에 자연스럽게 합일해 간다. 그런 서정이 짙어질수록 그의 그림 속 인간은 그려진 형태에 비해 훨씬 작게 느껴지고 추억의 싯귀들은 그만큼 큰 울림으로 퍼져나간다. 여기서 인간은 다시 자연의 작은 관찰자일 뿐이다. 그 울림이 전통 산수의 그것처럼 유장하게 퍼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생생히 포착한 것이 매화꽃 문양이 규칙적으로 점점이 박힌 화폭이다. 인간 형상이 들어간 화면과 분리돼 추상화된 그 화폭에서 우리는 전통적인 동양 회화의 깊은 정신세계를 다시금 맛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인간은 비켜서 있고 오로지 자연이 중심에 선 그런 느낌이다. 이만수가 기왕에 즐겨 써오던 ‘성’이라는 주제어 외에 ‘산조(散調)’ 라는 주제어를 택해 ‘성-산조’로 이번 전시의 타이틀을 삼은 것도 바로 그런 울림의 증폭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의 중심인, 주체로서의 인간으로부터 시작해 개인의 관념과 서정, 나아가 자연과 우주의 울림에 이르기까지 그 증폭되는 장단을 그는 가야금산조의 운율에 맞춰 전개시킨 것이다.
이렇듯 이만수는 오늘의 우리가 당면한 복합적인 상황과 그에 대한 우리의 정서적 반응을 나름의 방식으로 풀고 엮고 조형화하고 있다. 거기에 고정된 장르나 양식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의 의도와 지향을 놓치는 꼴이 된다. 그는 풀어둔 채 그대로 두지도 않고 또 엮어놓은 채 그대로 두지도 않는다. 꾸준히 풀고 엮고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의 예술적 지향이 ‘성(成)’ 이 아니라 ‘성(誠)’ 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흔들리는 시대일수록 더욱 가치 있는 덕목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