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부재의 인간과 그 현실의 관조
김상철 (동양미학)
지난 몇 년간에 걸쳐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한국화에 있어서의 치열했던 논의와 진지한 문제들은 이제 그간의 결과를 오늘이라는 얼굴을 통하여 그 구체적인 표정을 드러내고 있다. 다분히 표현주의적 양식이나 재료와 기법의 개방으로 야기된 절충적 표현, 그리고 이른바 한국적인 것에 대한 집착과 추구로부터 비롯된 민속적, 혹은 설화적 내용을 대해 소재주의적 관심 등은 바로 오늘의 한국화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표정들 중 비교적 두드러지는 인상들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한국화에 있어서의 변모와 변화는 과거 역사시대를 통틀어 보아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획기적인 것이었으며 고전적 심미관에 익숙해 있던 이들에게는 쉽게 수용될 수 없는 성지의 커다란 충격 그 자체였다. 이러한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이들의 의욕은 부분적으로는 호기심 어린 시선을 모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동시에 같은 분량에 해당하는 부정적인 견해 역시 감내하여야 할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러한 자기최면적인 요소가 강하게 내포된 긍정적인 측면 이외에 외부로부터 냉엄하게 다가오고 있는 부정적인 의사표시에 우리는 얼마나 설득력 있는 답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이른바 현대 한국화라는 것이 서양화와 닮아간다는, 그럼으로써 오히려 보다 소중한 어떤 것을 상실한 채 국적불명의 회화로 전락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이제는 그 작은 테두리 안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닮아 간다는 치명적인 유사화 현상에 대해서까지 이제 우리는 책임 있는 분명한 답변을 강요받고 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답의 궁극적 귀결처는 역시 그것이 현대 한국화로써의 그것에 있음은 당연하다.
이만수는 이러한 어려운 시대적 상황을 직접 부닥치고 있는 작가 중의 하나이다. 무광택의 토분에 의한 분방한 화면질의 구축, 그리고 도치된 인간의 모습을 통하여 조심스레 펼쳐 보이고 있는 인간의 현실적 고뇌, 타인과의 단절로부터 비롯된 현대인의 고독 등이 바로 우리들에게 각인되어진 그의 작품에 대한 일반적인 인상이다. 작가의 이러한 특징적 조형언어들은 이번에도 여전히 그 큰 줄기는 견지한 채 부분적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너무도 쉽게 작품이 변모하여 매 전시 때마다 괄목상대하게 하는 요즈음의 풍조에 비한다면 이만수의 이와 같은 모습은 정체로 보여 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거의 다소분방하고 거친 듯하던 필선들은 될 수 있는 한 절제되어 표현되고 있으며 화면을 가득 메우려던 치기어린 욕심 역시 어느 정도 순화되어 화면에 숨통을 한결 수월하게 풀어주고 있는 등의 보다 성숙된 변화를 알 수 있다. 사실 이와 같은 형식상의 특징적인 내용보다 우리가 좀 더 쉽게 체감할 수 있는 이만수의 특징은 작품 전반에서 배어나오고 있는 정체모를 어두움일 것이다. 그의 작품 하나하나 마다 깊게 드리워져 있는 정체모를 어두움일 것이다. 그의 작품 하나하나 마다 깊게 드리워져 있는 암울한 그림자는 평범한 일상사의 나열이나 형식적 조형실험에만 집착하고 있는 그러한 작품들에서는 느낄 수 없는 깊이 있는 어두움이 있다. 마치 오늘의 현실을 전망부재, 희망상실 쯤의 상황으로 간주하는 듯한 그의 작품에서의 어두움은 다분히 염세적이다.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발언 보다는 뒤로 한걸음 물러난 관조적 입장을 보이고 있는 그의 작품에서 우리가 치열한 삶의 땀 냄새보다는 어쩔 수 없는 기다림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직유보다는 은유와 상징적인 수단을 통해 작가의 발언은 웅변과 같은 호소력을 가지고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들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가시적인 변화는 바로 과거의 도치된 일그러진 인간의 형상이 부분적으로 부처나 미륵으로 대치되고 있는 점이다. 어쩌면 이러한 외형상의 변이는 작가의 기다림의 실체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단서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추측은 마치 선에 있어서의 화두처럼 화면에 등장하고 있는 상징성 짙은 개별적 사물들을 통해서 좀 더 구체화 되고 있으며 불이, 혹은 자성명 등의 명제들을 통하여 더욱 분형해지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만수의 작품들은 보여짐과 동시에 읽혀져야 할 내용들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밝고 맑은 깨우침을 통한 구원의 세계, 이것이 바로 작가가 추구하고 기다리는 그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그의 화면에 종종 등장하곤 하는 여러 사물들을 살펴본다면 우리는 불교적인 내음을 쉽게 맡을 수 있다. 물론 이미 특정한 목적을 지닌 목적화로서의 종교화도 있으나 이만수의 경우 이러한 사물들은 어떤 특정한 종교적 의미보다는 전래적인 정서에 부합되는 상징물서 이러한 사물들을 차용하고 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그가 만약 현실을 앞서 말한바와 같이 전망부재, 희망상실의 시대로 간주한다면 현실구원적 내용을 담고 있는 이러한 사물들은 현실에 대한 작가의 의사를 전달함에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매개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추론하여 볼 수 있는 점은 이러한 작가 자신이 주의하고 있는 한국적 정서에의 실제적인 접근 시도이다.
과거 소재주의적 경향이 유행하였던 것처럼 요즈음의 한국화단에 있어서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전래적인 설화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인 재해석의 시도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반드시 한국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비롯된 결과일 수도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동양화가 현실감을 상실한 관념적 유희에 불과하였다는 비판의 대안으로 현실과 역사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의지로도 보여 질 수 있다. 아무튼 이러한 경향은 현대 한국화에 있어서 표현은 물론 내용에 있어서도 운신의 폭을 넓혀주는 것으로 긍정될 수 있을 것이며 작가가 이러한 한국적 정서의 획득수단으로 일반적으로 이미 익숙해 있는 토속적 정서인 불교적 내용을 선택하고 있다는 점은 앞으로 그의 작업추이를 상상해 볼 수 있게 하는 흥미로운 요소 중의 하나이다.
전에도 늘 그러하였듯이 오늘의 한국화는 여전히 위기라는 말로써 표현되고 있다. 그간의 치열했던 논의와 의욕적인 모색의 결과가 역시 도로에 그치고 만다면 이는 분명 점검해 보아야 할 중대한 문제이다. 만약 이러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한국화는 영원히 열등한 그림으로써 언제나 당연히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오늘의 현실과 같은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제는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한 보다 솔직하고 진지한 자세가 필요할 때이다.
문제는 바로 이러한 자기최면적인 요소가 강하게 내포된 긍정적인 측면 이외에 외부로부터 냉엄하게 다가오고 있는 부정적인 의사표시에 우리는 얼마나 설득력 있는 답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이른바 현대 한국화라는 것이 서양화와 닮아간다는, 그럼으로써 오히려 보다 소중한 어떤 것을 상실한 채 국적불명의 회화로 전락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이제는 그 작은 테두리 안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닮아 간다는 치명적인 유사화 현상에 대해서까지 이제 우리는 책임 있는 분명한 답변을 강요받고 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답의 궁극적 귀결처는 역시 그것이 현대 한국화로써의 그것에 있음은 당연하다.
이만수는 이러한 어려운 시대적 상황을 직접 부닥치고 있는 작가 중의 하나이다. 무광택의 토분에 의한 분방한 화면질의 구축, 그리고 도치된 인간의 모습을 통하여 조심스레 펼쳐 보이고 있는 인간의 현실적 고뇌, 타인과의 단절로부터 비롯된 현대인의 고독 등이 바로 우리들에게 각인되어진 그의 작품에 대한 일반적인 인상이다. 작가의 이러한 특징적 조형언어들은 이번에도 여전히 그 큰 줄기는 견지한 채 부분적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너무도 쉽게 작품이 변모하여 매 전시 때마다 괄목상대하게 하는 요즈음의 풍조에 비한다면 이만수의 이와 같은 모습은 정체로 보여 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거의 다소분방하고 거친 듯하던 필선들은 될 수 있는 한 절제되어 표현되고 있으며 화면을 가득 메우려던 치기어린 욕심 역시 어느 정도 순화되어 화면에 숨통을 한결 수월하게 풀어주고 있는 등의 보다 성숙된 변화를 알 수 있다. 사실 이와 같은 형식상의 특징적인 내용보다 우리가 좀 더 쉽게 체감할 수 있는 이만수의 특징은 작품 전반에서 배어나오고 있는 정체모를 어두움일 것이다. 그의 작품 하나하나 마다 깊게 드리워져 있는 정체모를 어두움일 것이다. 그의 작품 하나하나 마다 깊게 드리워져 있는 암울한 그림자는 평범한 일상사의 나열이나 형식적 조형실험에만 집착하고 있는 그러한 작품들에서는 느낄 수 없는 깊이 있는 어두움이 있다. 마치 오늘의 현실을 전망부재, 희망상실 쯤의 상황으로 간주하는 듯한 그의 작품에서의 어두움은 다분히 염세적이다.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발언 보다는 뒤로 한걸음 물러난 관조적 입장을 보이고 있는 그의 작품에서 우리가 치열한 삶의 땀 냄새보다는 어쩔 수 없는 기다림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직유보다는 은유와 상징적인 수단을 통해 작가의 발언은 웅변과 같은 호소력을 가지고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들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가시적인 변화는 바로 과거의 도치된 일그러진 인간의 형상이 부분적으로 부처나 미륵으로 대치되고 있는 점이다. 어쩌면 이러한 외형상의 변이는 작가의 기다림의 실체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단서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추측은 마치 선에 있어서의 화두처럼 화면에 등장하고 있는 상징성 짙은 개별적 사물들을 통해서 좀 더 구체화 되고 있으며 불이, 혹은 자성명 등의 명제들을 통하여 더욱 분형해지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만수의 작품들은 보여짐과 동시에 읽혀져야 할 내용들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밝고 맑은 깨우침을 통한 구원의 세계, 이것이 바로 작가가 추구하고 기다리는 그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그의 화면에 종종 등장하곤 하는 여러 사물들을 살펴본다면 우리는 불교적인 내음을 쉽게 맡을 수 있다. 물론 이미 특정한 목적을 지닌 목적화로서의 종교화도 있으나 이만수의 경우 이러한 사물들은 어떤 특정한 종교적 의미보다는 전래적인 정서에 부합되는 상징물서 이러한 사물들을 차용하고 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그가 만약 현실을 앞서 말한바와 같이 전망부재, 희망상실의 시대로 간주한다면 현실구원적 내용을 담고 있는 이러한 사물들은 현실에 대한 작가의 의사를 전달함에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매개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추론하여 볼 수 있는 점은 이러한 작가 자신이 주의하고 있는 한국적 정서에의 실제적인 접근 시도이다.
과거 소재주의적 경향이 유행하였던 것처럼 요즈음의 한국화단에 있어서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전래적인 설화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인 재해석의 시도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반드시 한국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비롯된 결과일 수도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동양화가 현실감을 상실한 관념적 유희에 불과하였다는 비판의 대안으로 현실과 역사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의지로도 보여 질 수 있다. 아무튼 이러한 경향은 현대 한국화에 있어서 표현은 물론 내용에 있어서도 운신의 폭을 넓혀주는 것으로 긍정될 수 있을 것이며 작가가 이러한 한국적 정서의 획득수단으로 일반적으로 이미 익숙해 있는 토속적 정서인 불교적 내용을 선택하고 있다는 점은 앞으로 그의 작업추이를 상상해 볼 수 있게 하는 흥미로운 요소 중의 하나이다.
전에도 늘 그러하였듯이 오늘의 한국화는 여전히 위기라는 말로써 표현되고 있다. 그간의 치열했던 논의와 의욕적인 모색의 결과가 역시 도로에 그치고 만다면 이는 분명 점검해 보아야 할 중대한 문제이다. 만약 이러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한국화는 영원히 열등한 그림으로써 언제나 당연히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오늘의 현실과 같은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제는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한 보다 솔직하고 진지한 자세가 필요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