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두리 속 삶의 정경 위로 꽃비가 내리다
고충환 (미술평론)
작가는 낚시를 즐긴다고 했다.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취미라고도 했다. 어떤 사람에게 낚시는 구실이며 아이러니다. 무슨 말이냐면, 낚시는 고기를 낚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낚고 세월을 낚고 기억을 낚고 회한을 낚고 유년을 낚는다. 마치 인터넷의 바다를 서핑하고 캡처하듯 흐르는 물속에서 단상들을 낚아 올린다는 점에선 같지만, 정신을 집중하는 것과 느슨하게 유지하는 등 집중력의 밀도감이 다르다. 집중은 일상의 일이지 낚시의 일은 아니다. 낚시의 덕목은 오히려 방임과 방심 쪽에 가깝다. 자기를 놓아버리는 것. 그렇게 방심하고 있어야 더 잘 보이고 더 잘 낚이는 것들이 있다. 할 일 없이 거닐 때 눈에 더 잘 들어오고 더 잘 붙잡히는 일들이 있는 법이다. 삶의 목적성을 내려놓는 방심이나 의식의 끈을 느슨하게 잡아 오히려 무의식을 투명하게 하는 소요가 예술과도 통하고 하다못해 공상과도 통한다. 그렇게 방심과 소요를 프리즘 삼아 보면 무엇이 보이는가. 바로 흐르지 않는 물을 통해 흐르는 물이 보인다. 표면을 통해 이면이 보이고 정적인 것을 통해 동적인 것이 보인다. 바로 정중동이 아닌가.
그렇게 작가의 화면은 정중동의 와중에서 건져 올린 시간이며 세월이며 기억이며 회한이며 유년의 단상들로 점경을 이루고 있다. 점경이라고 했다. 뭔가 아스라해서 잘 보이지도 잘 붙잡히지도 않는 풍경이다. 아득하고 아련한 풍경이라고나 할까. 이처럼 그 풍경이 아득하고 아련한 것은 흐르는 의식(아님 무의식?) 속에서 건져 올린 것들이며, 시간과 망각의 풍화로부터 건져낸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점경들 위엔 무슨 투명한 피막처럼 시간의 더께가 내려앉아 있고, 망각이 공기처럼 감싸고 있다. 그 투명한 더께와 공기 뒤편으로 무엇이 보이는가. 흐르지 않는 물을 통해 보이는 흐르는 물속에서 무엇이 보이는가. 여차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들이며, 존재감이 희박해서 오히려 더 또렷하고 오롯한 것들이 보인다. 작가의 그림은 그렇게 흐르는 물속에서 건져 올린 것들이다.
작가는 그림을 마당에다가 비유한다. 그리고 알다시피 마당은 평면이다. 이렇게 해서 작가의 그림이 평면으로 와 닿는 이유가 설명이 된다. 너무 단순한가. 그래서 허망한가. 주지하다시피 평면은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핵심이며 중추가 아닌가. 회화가 가능해지는 시점이며 최소한의 조건이 평면이다. 이처럼 평면을 추구하는 이면에는 회화의 본질과 이유를 묻는 개념미술의 일면이 있고, 회화의 가능조건으로 회화를 소급시키는 환원주의적 태도가 있다. 작가는 말하자면 마당이라는 결정적인 베이스를 가정함으로써, 그리고 마당과 평면을 일치시킴으로써 의식적으로나 최소한 무의식적으로 회화 자체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마당은 누워있는 그림이고 평면은 서 있는 그림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누워있는 그림으로 하여금 어떻게 서 있는 그림에 일치시킬 것인가. 서 있는 그림을 어떻게 마당처럼 쓸 것이며 마루처럼 닦아낼 것인가. 여하튼 순백의 화면을 그렇게 쓸고 닦아야 비로소 그림이 되지가 않겠는가. 무정의 화면을 유정의 화면으로 바꿔놓을 수 있지가 않겠는가. 여기서 마당은 다른 말로 하자면 장이다. 장은 알다시피 회화의 됨됨이와 관련해 미학적으로 더 일반적이고 보편적으로 알려진 개념이다. 회화의 전제조건으로서의 장과 마당과 평면이 하나로 통하는 것. 그렇다면 작가는 이 장이며 마당이며 평면 위에 무엇을 어떻게 올려놓고 있는가.
작가의 그림은 그 실체가 손에 잡히는 모티브들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평면적이고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다. 이를테면 핸드폰을 거는 사람, 물끄러미 쳐다보는 사람, 종종걸음을 걷는 사람, 새와 오리와 강아지 그리고 가옥과 같은 일상의 정경들이 전개되고 있지만, 그것들은 하나같이 어떤 감각적 실재로서의 배경을 가지고 있지가 않다. 적어도 외관상 깊이가 없는 평면 위에 일상으로부터 채집된 단상들이며 모티브들이 마치 콜라주 하듯 얹혀 있다(작가는 실제로 콜라주를 주요한 방법으로 차용하기도 한다). 원근법에 의한 환영적인 깊이나 화면 속에 공간적인 깊이를 조성하는 내진감이 만들어낸 화면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에서 감각적 현실을 재현한 공간으로서보다는 작가의 관념에 의해 재구성된 관념적 공간에 가깝다. 말하자면 작가의 작업에서 관심의 축이며 방법론의 축은 감각적 현실의 재현에 있기보다는 일종의 관념적 공간을 재구성해내는 일에 그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 것. 그렇다면 이렇게 재구성된 작가의 관념을 읽어내는 일이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이를테면 작가는 자신의 관념으로 세계를, 자연을, 일상을 어떻게 재구성해내고 있는가. 관념의 프리즘을 통해 본, 그래서 작가가 제안하고 있는 우주의 꼴은 어떤가.
작가는 그림을 마당(사실상 작가의 우주에 해당하는)에다가 비유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림을 마당처럼 비로 쓴다. 비유적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쓴다. 가늘고 딱딱한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일종의 작은 비나 풀을 먹여 빳빳하게 세운 붓 내지 끝이 무딘 몽땅 붓을 붓 대신 사용하는데, 여러 겹 덧바른 안료 층 위에 이 비로 쓸어내리면 소지 자체의 신축성 탓에 화면에 비정형의 홈이며 자국이 생긴다(홈은 소지의 특성에 따라서 캔버스보다는 종이에서 더 또렷한 편이다). 그리고 그 위에 또 다른 안료 층을 덮고 마치 걸레로 마루를 닦아내듯 화면을 물로 씻어내는데, 그 수위를 조절하는 여하에 따라서 그림이 흐릿해지기도 또렷해지기도 한다. 여하한 경우에도 색 자체가 드러나 보이는 법은 없는데, 마치 시간의 지층으로부터 끄집어낸 듯, 기억의 한 자락을 건져 올린 듯, 과거로부터 불현듯 현재 위로 호출된 듯 아득하고 아련한 분위기가, 작가 고유의 아이덴티티랄 만한 특유의 아우라가 조성되는 것이다. 아마도 작가의 유년에 기인할 절간의 벽화처럼 시간의 흔적이며 풍화의 흔적 그대로를 고스란히 머금고 있는 색감이며 색채 감수성이 확인되는 부분이다. 이로써 어쩌면 작가의 관심은 그 흔적에 있을지도 모르고, 아예 어떤 흔적(이를테면 삶의 흔적 같은)을 만들고 조성하는 일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삶 자체보다는 삶의 흔적에 그 초점이 맞춰진 것인데, 비로 쓸어내린 스크래치(그 자체 삶의 상처며 트라우마의 표상으로 볼 법한)도, 굳이 씻어내고 닦아내면서까지 얻고 싶은 색 바랜 색감도 바로 그 흔적을 부각하는 일에 종사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련의 과정 자체가 꽤나 의미심장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작가는 비로 쓸고 걸레로 닦아내고 물로 씻어내는 과정을 통해서 그림을 그리고 만든다. 비로 쓸고 걸레로 닦아내고 물로 씻어낸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고 만든다? 이야 말로 자기수양이고 수신이 아닌가. 전통적인 그림에서 요구되던 태도며 덕목이 아닌가? 윤동주의 <참회록>에는 밤이면 밤마다(왜 하필이면 밤인가? 시인에게 밤은 무슨 의미인가? 암울한 시대며 현실에 대한 표상? 무기력한 존재의 표상?)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거울을 닦는 시인이 나온다. 뭘 참회할 일이 그렇게나 많았을까. 더욱이 시인이. 시인의 참회이기에 그 참회가 예사롭지가 않다. 시인의 참회? 자기반성적인 인간의 참회? 거울은 자기를 반영하는 물건이다. 그러므로 거울을 닦는 행위는 사실은 자기를 닦는 행위이다. 작가는 이렇게 비로 쓸어내고 걸레로 닦아내고 물로 씻어내는 그림을 그리고 만들면서 사실은 자기를 쓸어내고 닦아내고 씻어내고 있었다(방심과 소요를 위한 방편으로서 의미기능하고 있는 낚시 역시 일정하게는 이런 수신과 통한다). 그렇게 자신의 관념과 그림의 방법론을 일치시키고 있었다. 흔히 관념과 방법이 겉도는 경우와 비교되는 것이어서 더 신뢰감이 가고 설득력을 얻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그림은 감각적 현실을 재현한 것이기보다는 관념적 현실을 재구성한 것이라고 했다. 마당이며 장이며 평면적 조건으로서 배경을 대신한 것이나, 쓸고 닦고 씻어내는 방법론에다가 자기수양이며 수신의 관념적 의미 내지 실천논리를 일치시킨 것이 그렇다. 이처럼 관념적인 그림은 상대적으로 상징이며 표상형식이 강한 편이다.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상징으로는 대개는 화면의 정중앙에 위치한 큰 물방울과 원형을 들 수가 있겠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물방울은 사람들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을 상징한다고 했다. 삶의 희로애락을 압축해놓은 상징이다. 그리고 그 상징적 의미는 작가의 그림을 시종 뒷받침해온 산조의 주제의식과도 통한다. 산조 곧 노랫가락이란 것이 원래 삶의 희로애락을 녹여낸 것이 아닌가. 그리고 원형은 완전하고 온전한 삶의 지향을 상징하고, 반복 순환하는 존재의 원리(비의?)를 상징한다. 알다시피 원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밑도 없고 위도 없다. 구심력과 원심력으로 작용하는 운동이 있지만 방향도 없다. 다만 끊임없이 연이어지면서 되돌려지는 과정이 있을 뿐. 아마도 그렇게 연이어지면서 되돌려지는 원주는 이렇듯 반복 순환되는 존재와 더불어 윤회하는 존재도 의미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그 억만 겁의 원주 위에 잠시 잠깐 등록되어졌다가 삭제되는 찰나적인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처럼 의미심장한 의미들을 각각 물방울과 원형이라는 상징과 표상형식에 담아냈다. 여기서 상징과 표상이 강하면 자칫 그림이 도상학적으로 빠질 수도 있는데, 그러나 작가의 그림은 도상학에 빠지지가 않는다. 알다시피 비로 쓸고 걸레로 닦아내고 물로 씻어내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상징과 표상의 꼴이 그림의 살의 일부가 될 지경으로 스며들게 한 것이다. 상징과 표상의 의미를 무리 없이 전달하면서도 도상학에 빠지지 않는 것, 그것은 전적으로 감각의 문제이며 작가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작가는 이처럼 관념적 현실을 재구성한다. 그리고 그렇게 재구성된 현실을 한정하는데, 바로 그림의 가장자리를 일종의 띠 그림으로 둘러친 것이다. 삶이 전개되는 장으로서의 마당이 갖는 의미를 삶의 가두리라는 또 다른 의미로 강조한 것이다. 삶의 의미를 지시하기 위해 각각 마당과 가두리가 호출되고 있는 것인데(보다 일반적으론 무대의 개념을 떠올려볼 수가 있겠다), 현실을 재구성하기 위한 일종의 관념적인 장치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리고 그렇게 재구성된 현실 위로 꽃비가 내린다. 매화 꽃잎이다. 어떤 매화 꽃잎은 무슨 밭고랑인양 가로 혹은 세로로 줄을 짓고 있어서 저마다 살아온 삶의 고랑(작가의 용어로 치자면 주름)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어떤 매화 꽃잎은 별자리로 둔갑해 사람들의 꿈을 대리하고, 이도저도 아닌 꽃잎들은 그저 삶의 정경 위로 축복처럼, 위로처럼 흩날린다. 그리고 그렇게 흩날리면서 쓸쓸한 삶을 감싸 안는다.
그렇게 작가의 화면은 정중동의 와중에서 건져 올린 시간이며 세월이며 기억이며 회한이며 유년의 단상들로 점경을 이루고 있다. 점경이라고 했다. 뭔가 아스라해서 잘 보이지도 잘 붙잡히지도 않는 풍경이다. 아득하고 아련한 풍경이라고나 할까. 이처럼 그 풍경이 아득하고 아련한 것은 흐르는 의식(아님 무의식?) 속에서 건져 올린 것들이며, 시간과 망각의 풍화로부터 건져낸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점경들 위엔 무슨 투명한 피막처럼 시간의 더께가 내려앉아 있고, 망각이 공기처럼 감싸고 있다. 그 투명한 더께와 공기 뒤편으로 무엇이 보이는가. 흐르지 않는 물을 통해 보이는 흐르는 물속에서 무엇이 보이는가. 여차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들이며, 존재감이 희박해서 오히려 더 또렷하고 오롯한 것들이 보인다. 작가의 그림은 그렇게 흐르는 물속에서 건져 올린 것들이다.
작가는 그림을 마당에다가 비유한다. 그리고 알다시피 마당은 평면이다. 이렇게 해서 작가의 그림이 평면으로 와 닿는 이유가 설명이 된다. 너무 단순한가. 그래서 허망한가. 주지하다시피 평면은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핵심이며 중추가 아닌가. 회화가 가능해지는 시점이며 최소한의 조건이 평면이다. 이처럼 평면을 추구하는 이면에는 회화의 본질과 이유를 묻는 개념미술의 일면이 있고, 회화의 가능조건으로 회화를 소급시키는 환원주의적 태도가 있다. 작가는 말하자면 마당이라는 결정적인 베이스를 가정함으로써, 그리고 마당과 평면을 일치시킴으로써 의식적으로나 최소한 무의식적으로 회화 자체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마당은 누워있는 그림이고 평면은 서 있는 그림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누워있는 그림으로 하여금 어떻게 서 있는 그림에 일치시킬 것인가. 서 있는 그림을 어떻게 마당처럼 쓸 것이며 마루처럼 닦아낼 것인가. 여하튼 순백의 화면을 그렇게 쓸고 닦아야 비로소 그림이 되지가 않겠는가. 무정의 화면을 유정의 화면으로 바꿔놓을 수 있지가 않겠는가. 여기서 마당은 다른 말로 하자면 장이다. 장은 알다시피 회화의 됨됨이와 관련해 미학적으로 더 일반적이고 보편적으로 알려진 개념이다. 회화의 전제조건으로서의 장과 마당과 평면이 하나로 통하는 것. 그렇다면 작가는 이 장이며 마당이며 평면 위에 무엇을 어떻게 올려놓고 있는가.
작가의 그림은 그 실체가 손에 잡히는 모티브들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평면적이고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다. 이를테면 핸드폰을 거는 사람, 물끄러미 쳐다보는 사람, 종종걸음을 걷는 사람, 새와 오리와 강아지 그리고 가옥과 같은 일상의 정경들이 전개되고 있지만, 그것들은 하나같이 어떤 감각적 실재로서의 배경을 가지고 있지가 않다. 적어도 외관상 깊이가 없는 평면 위에 일상으로부터 채집된 단상들이며 모티브들이 마치 콜라주 하듯 얹혀 있다(작가는 실제로 콜라주를 주요한 방법으로 차용하기도 한다). 원근법에 의한 환영적인 깊이나 화면 속에 공간적인 깊이를 조성하는 내진감이 만들어낸 화면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에서 감각적 현실을 재현한 공간으로서보다는 작가의 관념에 의해 재구성된 관념적 공간에 가깝다. 말하자면 작가의 작업에서 관심의 축이며 방법론의 축은 감각적 현실의 재현에 있기보다는 일종의 관념적 공간을 재구성해내는 일에 그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 것. 그렇다면 이렇게 재구성된 작가의 관념을 읽어내는 일이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이를테면 작가는 자신의 관념으로 세계를, 자연을, 일상을 어떻게 재구성해내고 있는가. 관념의 프리즘을 통해 본, 그래서 작가가 제안하고 있는 우주의 꼴은 어떤가.
작가는 그림을 마당(사실상 작가의 우주에 해당하는)에다가 비유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림을 마당처럼 비로 쓴다. 비유적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쓴다. 가늘고 딱딱한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일종의 작은 비나 풀을 먹여 빳빳하게 세운 붓 내지 끝이 무딘 몽땅 붓을 붓 대신 사용하는데, 여러 겹 덧바른 안료 층 위에 이 비로 쓸어내리면 소지 자체의 신축성 탓에 화면에 비정형의 홈이며 자국이 생긴다(홈은 소지의 특성에 따라서 캔버스보다는 종이에서 더 또렷한 편이다). 그리고 그 위에 또 다른 안료 층을 덮고 마치 걸레로 마루를 닦아내듯 화면을 물로 씻어내는데, 그 수위를 조절하는 여하에 따라서 그림이 흐릿해지기도 또렷해지기도 한다. 여하한 경우에도 색 자체가 드러나 보이는 법은 없는데, 마치 시간의 지층으로부터 끄집어낸 듯, 기억의 한 자락을 건져 올린 듯, 과거로부터 불현듯 현재 위로 호출된 듯 아득하고 아련한 분위기가, 작가 고유의 아이덴티티랄 만한 특유의 아우라가 조성되는 것이다. 아마도 작가의 유년에 기인할 절간의 벽화처럼 시간의 흔적이며 풍화의 흔적 그대로를 고스란히 머금고 있는 색감이며 색채 감수성이 확인되는 부분이다. 이로써 어쩌면 작가의 관심은 그 흔적에 있을지도 모르고, 아예 어떤 흔적(이를테면 삶의 흔적 같은)을 만들고 조성하는 일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삶 자체보다는 삶의 흔적에 그 초점이 맞춰진 것인데, 비로 쓸어내린 스크래치(그 자체 삶의 상처며 트라우마의 표상으로 볼 법한)도, 굳이 씻어내고 닦아내면서까지 얻고 싶은 색 바랜 색감도 바로 그 흔적을 부각하는 일에 종사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련의 과정 자체가 꽤나 의미심장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작가는 비로 쓸고 걸레로 닦아내고 물로 씻어내는 과정을 통해서 그림을 그리고 만든다. 비로 쓸고 걸레로 닦아내고 물로 씻어낸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고 만든다? 이야 말로 자기수양이고 수신이 아닌가. 전통적인 그림에서 요구되던 태도며 덕목이 아닌가? 윤동주의 <참회록>에는 밤이면 밤마다(왜 하필이면 밤인가? 시인에게 밤은 무슨 의미인가? 암울한 시대며 현실에 대한 표상? 무기력한 존재의 표상?)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거울을 닦는 시인이 나온다. 뭘 참회할 일이 그렇게나 많았을까. 더욱이 시인이. 시인의 참회이기에 그 참회가 예사롭지가 않다. 시인의 참회? 자기반성적인 인간의 참회? 거울은 자기를 반영하는 물건이다. 그러므로 거울을 닦는 행위는 사실은 자기를 닦는 행위이다. 작가는 이렇게 비로 쓸어내고 걸레로 닦아내고 물로 씻어내는 그림을 그리고 만들면서 사실은 자기를 쓸어내고 닦아내고 씻어내고 있었다(방심과 소요를 위한 방편으로서 의미기능하고 있는 낚시 역시 일정하게는 이런 수신과 통한다). 그렇게 자신의 관념과 그림의 방법론을 일치시키고 있었다. 흔히 관념과 방법이 겉도는 경우와 비교되는 것이어서 더 신뢰감이 가고 설득력을 얻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그림은 감각적 현실을 재현한 것이기보다는 관념적 현실을 재구성한 것이라고 했다. 마당이며 장이며 평면적 조건으로서 배경을 대신한 것이나, 쓸고 닦고 씻어내는 방법론에다가 자기수양이며 수신의 관념적 의미 내지 실천논리를 일치시킨 것이 그렇다. 이처럼 관념적인 그림은 상대적으로 상징이며 표상형식이 강한 편이다.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상징으로는 대개는 화면의 정중앙에 위치한 큰 물방울과 원형을 들 수가 있겠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물방울은 사람들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을 상징한다고 했다. 삶의 희로애락을 압축해놓은 상징이다. 그리고 그 상징적 의미는 작가의 그림을 시종 뒷받침해온 산조의 주제의식과도 통한다. 산조 곧 노랫가락이란 것이 원래 삶의 희로애락을 녹여낸 것이 아닌가. 그리고 원형은 완전하고 온전한 삶의 지향을 상징하고, 반복 순환하는 존재의 원리(비의?)를 상징한다. 알다시피 원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밑도 없고 위도 없다. 구심력과 원심력으로 작용하는 운동이 있지만 방향도 없다. 다만 끊임없이 연이어지면서 되돌려지는 과정이 있을 뿐. 아마도 그렇게 연이어지면서 되돌려지는 원주는 이렇듯 반복 순환되는 존재와 더불어 윤회하는 존재도 의미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그 억만 겁의 원주 위에 잠시 잠깐 등록되어졌다가 삭제되는 찰나적인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처럼 의미심장한 의미들을 각각 물방울과 원형이라는 상징과 표상형식에 담아냈다. 여기서 상징과 표상이 강하면 자칫 그림이 도상학적으로 빠질 수도 있는데, 그러나 작가의 그림은 도상학에 빠지지가 않는다. 알다시피 비로 쓸고 걸레로 닦아내고 물로 씻어내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상징과 표상의 꼴이 그림의 살의 일부가 될 지경으로 스며들게 한 것이다. 상징과 표상의 의미를 무리 없이 전달하면서도 도상학에 빠지지 않는 것, 그것은 전적으로 감각의 문제이며 작가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작가는 이처럼 관념적 현실을 재구성한다. 그리고 그렇게 재구성된 현실을 한정하는데, 바로 그림의 가장자리를 일종의 띠 그림으로 둘러친 것이다. 삶이 전개되는 장으로서의 마당이 갖는 의미를 삶의 가두리라는 또 다른 의미로 강조한 것이다. 삶의 의미를 지시하기 위해 각각 마당과 가두리가 호출되고 있는 것인데(보다 일반적으론 무대의 개념을 떠올려볼 수가 있겠다), 현실을 재구성하기 위한 일종의 관념적인 장치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리고 그렇게 재구성된 현실 위로 꽃비가 내린다. 매화 꽃잎이다. 어떤 매화 꽃잎은 무슨 밭고랑인양 가로 혹은 세로로 줄을 짓고 있어서 저마다 살아온 삶의 고랑(작가의 용어로 치자면 주름)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어떤 매화 꽃잎은 별자리로 둔갑해 사람들의 꿈을 대리하고, 이도저도 아닌 꽃잎들은 그저 삶의 정경 위로 축복처럼, 위로처럼 흩날린다. 그리고 그렇게 흩날리면서 쓸쓸한 삶을 감싸 안는다.